1. 한산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1952년 4월 조선입니다. 영화는 왜의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의 용인 전투에서의 승리로 시작됩니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는 2천명의 군사로 기습하여 조선의 마지막 수도방위군 5만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이제는 자신이 조선의 해군을 소탕하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일본군은 육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이미 수도인 한양까지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전생이 시작된지 15일만에 수도를 점령했으니 조선을 손 쉽게 차지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순신 장군(박해일)의 사천해전을 보여줍니다. 이순신 장군 덕분에 조선은 육지에서의 고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는 연승을 거두며 일본 본토로 부터의 추가 병력과 물자 수송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이 출전하였고, 이를 본 일본 수군은 전설 속 바다괴물(복카이센)을 실제로 본 듯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이렇게 육지와 바다에서 각각 연전연승을 거두던 두 장수가 맞붙는 전쟁이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한산도 대첩’입니다. 거북선의 존재를 알게된 와키자카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철저히 조사하고 자객을 보내 거북선의 약점을 알아냅니다. 조선 수군의 해전 연습과정을 보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전략을 짜기도 하고 조선수군의 판옥선과 화포의 특징을 철저히 조사합니다. 조선의 배는 크고 속도가 느리지만 양쪽으로 화포를 쏠 수 있고 이 화포의 사정거리가 깁니다. 이에반해 일본의 배는 속도가 빠른 쾌속선으로 적의 배에 빠르게 붙어 수군이 상대의 배위로 넘어가 적들을 물리치는 전략을 가지는 배입니다. 이순신장군 또한 와키자카의 용인전투를 복기하며 그의 전투성향을분석해 상대가 공격해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영화는 한번의 완벽한 승리를 위해 두 장수가 각각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그려집니다. 그리고 두 수군은 마침내 견내량에서 마주칩니다. 물길이 좁은 견내량은 큰 배를 가진 조선 수군에게는 불리한 전장이므로 이순신 장군은 적군을 견내량에서 끌어내 한산도 앞바다에 성을 쌓는 학익진을 펼칠 계획을 세웁니다. 영화는 1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거북선의 활약, 이순신 장군과 야스하루의 지략싸움, 두 장군의 긴장감과 고뇌를 고스란히 그려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기에 대부분의 관객이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두는 이 전투의 결말을 알고 보면서도,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으로 러닝타임 내내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입니다.
2. 거북선과 이순신장군
거북선은 갑판 위에는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칼과 창을 꽂아 당시 일본 수군의 주 전략이던 적선에 접근하여 월선 후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미에 달린 거북머리와 배의 측면에는 화포를 장착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판자로 덮어 격군들과 포수를 보호했습니다. 거북선은 전쟁에서 돌격선의 역할을 했습니다. 적진으로 들어가 적선들을 헤집어 놓는 역할을 위해 거북선의 아래쪽에는 적선 충파용 돌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 적선들을 충파로 부수고 적선에 둘러싸이면 화포를 쏴서 일본수군을 공포에 떨게 한 이 거북선이 역사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413년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던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크기나 규모등은 기록에정확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거북선은 이후로 180년 가량 기록에 없다가 임진년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재등장합니다. 왜군의 정세를 살피며 전쟁준비를 해오던 이순신 장군이 군관 나대용 등에게 건조를 지시해 임진왜란 직전 건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이 실전에 쓰일 수 있도록 완성된 것은 일본군이 침공하기 단 하루 전인 4월 12일이었습니다. 거북선은 영화 ‘한산‘의 시작이기도 한 임진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해전에 참가해 일본군들을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처럼 '한산도 대첩'에서 큰 활약을해 조선 수군에게 대승을 안겨줍니다. 손쉽게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일본군은 바다에서의 연이은 큰 패배에 전력과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바다를 통해 전쟁물자와 추가병력을 공급하려던 일본은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있는 바닷길을 쉽게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거북선의 첫 고안과 건조를 이순신 장군이 직접 다 한것은 아니지만, 백성을 지키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던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거북선이 전쟁에 쓰일 수도,위기에 빠진 조선을 지켜 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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